디스토피아, 절멸의 상상력과 페미니즘

이정현
Notes

📝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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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에게 발견되기 이전의 모든 기억이 삭제된 고고는 자신의 과거가 궁금하지만 자신이 인간을 해하기 위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닐까 두려워한다. 고고는 랑과의 기억을 복습하면서 랑을 애도하는 법을 학습한다. 고고는 사막을 여행하면서 인간, 로봇, 외계인을 차례로 만난다. 고고는 외계인 '살리'덕분에 자신이 랑에게 발견되기 전의 과거(제작 목적)를 알게 된다. 인류가 거의 절멸하고 지구가 사막화된 지경에 이른 것은 수천 년 동안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인간들은 주저하지 않고 임무를 수행하는 인공지능 로봇들을 전쟁에 동원했다. 고고는 전쟁에 참가한 로봇 중 하나였다. 다만 부상병을 돌보는 의무병 로봇이었기에 인간을 살해하는 것은 프로그램에 입력되지 않았을 뿐이다.

미국 철학자 레비 브라이언트는 기후변화가 우리를 위협하는 시대에서 인간만이 예외라는 편견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물질과 비물질, 유형과 무형 존재를 구분하지 않고 현존하는 모든 존재자를 '기계'라고 명명한다. 포스트휴머니즘 매체생태론을 다룬 저서 '존재의 지도'에서 기계가 '행위주체'가 되려면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거론한다. 어떤 기계가 자신의 내부에서 행동을 개시할 수 있다면 그 기계는 행위주체다. 그 다음으로 어떤 행위주체가 행위주체로 여겨지려면, 그것은 행동을 개시하거나 자극에 대응하면서 행위를 실행할 때 몇 가지 다른 행위 중 선택하여 실행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어떤 기계가 주변 환경에서 수용할 수 있는 입력물은 한정되어 있기에 이런 특성을 그 기계의 '구조적 접속의 선택성'이라고 일컫는데, 그 기계의 감성으로 여길 수 있는 또 다른 역능이다. 기계는 '구조적 접속의 선택성'과 '조작적 폐쇄성'으로 특징지어지는 역능으로 개체화된다. 이런 '선택성'과 '폐쇄성'으로 인해 기계들의 소통은 어김없이 어긋나게 되므로 브라이언트는 세계가 다른 기계에 어떠한지를 탐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브라이언트의 논의는 천선란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공지능 로봇을 이해하는 단서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