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arrier Bag Theory of Fiction

Nomadia
Notes

📝 내용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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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내가 소설을 좋아하는 이유다. 영웅 대신에 소설은 그 안에 민중을 넣는다. 그래서 내가 SF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엄청나게 무거운 짐짝을 옮겼었다. 내 운반가방은 멍청이들과 약골들, 겨자씨보다 더 작은 곡류들로 가득 찼고, 애써 매듭이 보이지 않도록 복잡하게 짠 그물은 하나의 작은 조약돌, 다른 세상의 시간을 알리며 안정적으로 작동하는 크로노미터, 그리고 쥐의 해골바가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끝 없는 시작들, 최초의 것들, 잃어버린 것들, 변신과 번역들을 담고 있으며, 갈등보다는 속임수들, 덫과 망상들보다 더 적은 승리이다. 오도 가도 못하는 우주선, 실패한 임무, 그리고 이해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야생 귀리 껍질을 까려고 우리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에 대하 말하는 것이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어느 누가 소설 쓰는 것이 쉽다고 말할 것인가?

 만약 SF가 현대 기술의 신화라면, 그 신화는 분명 비극일 것이다. ‘기술’ 혹은 ‘현대 과학’ (사람들이 늘 쓰는 방식대로 그 단어를 사용하면, 그것은 검증되지 않은 속기록처럼, ‘어려운’ 과학들과 고도의 기술이란 경제 성장을 계속 뒷받침하는 것일 뿐이다.)은 하나의 영웅적인 수행과정이다. 헤라클레스적이고, 프로메테우스적인 것으로서 이것은 승리로 인정되지만, 그래서 궁극적으로 비극이다. 이러한 신화에 구현된 허구소설(fiction)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앞으로도 의기양양할 것이다. (인간은 대지, 공간, 외계, 죽음, 미래 등등을 정복한다) 그리고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묵시록, 홀로코스트, 그때나 지금이나)

 하지만 만약 우리가 이 선형적이고, 진보적이며, 기술-영웅주의의 살육의 시간화살을 피하고, 과학과 기술을 지배의 무기가 아니라 원초적인 문화 운반가방으로 재정의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즐거운 부수효과를 볼 수 있다. 즉 이때 SF는, 프로메테우스나 묵시록과 같은 것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고 완고하고, 편협한 시각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실상 어떤 사실적인 것보다 덜 신화적인 장르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