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모던 디자인의 폐허 1

임근준 Geun-jun Lim
Notes

[내용 발췌]
화이트큐브의 활동이 중심인 미술가에게는 세상 변화에 비평적으로 대응하는 일 자체가 직업이고 또 그를 실현할 기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시장에 연루된 현업 실무 활동이 중요한 디자이너에게는 세상 변화에 비평적으로 대응하는 일은 부차적인 과제로 인식되기 쉽다. (그래서 북미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바람이 거셌던 1980년대 초중반이나 국내에서 그 바람이 이어졌던 1990년대 초중반, 디자인 현업 다수의 종사자가 포스트모더니즘을 지나가는 몹쓸 유행으로 간주했더랬다.) 현업에서 일거리를 (그리고 전문가로서의 위상과 체면도) 잃은 디자이너에게 대안적 실험을 시도할 기회가 제공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구식 디자인 교육을 받은 채 사회에 과잉 공급되고 있는 청년 디자이너들은 시장에서 전문가 대접을 못 받고 일거리를 찾아 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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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변화로 인해 전문직능의 위기가 도래하면 전문가 사회가 그 위기의 본질을 파악하고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디자인계에서 그런 담론적 구심점 노릇을 하는 곳을 찾기는 쉽지 않다. 지구 상 어느 디자인미술관도 주요 현대미술관이 미술가에게 행해온 절대적인 영향력을 획득/구현해본 바 없고, 또 그처럼 첨예한 비평의 공론장으로 기능해본 적도 없다. 또 미술가들에게 베풀어지는 스튜디오 거주 프로그램이나 신작 창작을 추동하는 경쟁적 시상 제도는 여간해서 디자인계에 도입-정착되지 못한다. (오래도록 국내외 디자인계 유일한 공론장은 디자인계의 특유의 업계지였다. 인터넷과 스마트 기술의 보급 이후, 유서 깊은 디자인 잡지들은 왕년의 구심점 기능을 상실했다. 예컨대 <월간 디자인>은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업계지였다.